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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롤의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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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문이 말하는 인문학의 존재 이유

소로롤 2022. 4. 14.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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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문'이 말하는 인문학의 존재 이유

~문과대에 강의실을 許하라~

(김진영, 사회 12, N잡러)



바야흐로 2022년이다. 내가 문과대학에 입학했던 2012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났다. 10년간 인문학, 즉 '협문'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졌다. 이런 말 하면 너무 나이 들어 보여서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라떼'를 언급하자면, 10년 전 까지만 해도 캠퍼스에는 낭만이 있었다. 낭만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이 좋아하는 vs 게임을 해 보자. "하루 8시간, 주 40시간 회사에서 업무 vs 선후배들과 술 마시고 토론", 어떤 것이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최현미 문화일보 부장님이 최근작 "사소한 기쁨"에서 말씀하셨듯, 낭만은 어쩌면 상당히 비생산적인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소설이자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술을 진탕 마시고 사회 이슈나 거대 담론에 대해 토론하는 일, 정말이지 어떠한 경제 가치와도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이 무척이나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IMF 외환위기 및 신자유주의 정책을 거치며 실용주의적 사고관이 한동안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면에서 전반적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2010년대 초, 이러한 실용주의를 넘어서서 인문학에서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다. 2012년의 캠퍼스 키워드는 '인문학'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 라떼는 말이야, '협문'(협문이라 함은 협의의 문과를 지칭한다. 경제, 경영 등 상경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문과를 말한다)이란 말도 없었다고! 문사철 전공자는 되려 멋지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캠퍼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협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마찬가지로 상전벽해 하듯 판이하게 변화했다. 이제 '협문 전공'이라 하면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인다. 특별히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문송하다', '광의의 문과', '비상경 협문' 등 갖가지 표현이 온, 오프라인 커뮤니티에 만연하다. 우리 '협문'은 거의 조롱, 천대, 멸시까지 받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하에서 우리 '협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도정일(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명예교수) "대담", 그리고 김영하(소설가)의 최근 인터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도정일 교수는 인문학의 본질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김영하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4차 산업 혁명 시기를 온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 MZ세대는, '타인의 삶'에 그 어떤 선조들보다도 많이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인별' 등 각종 SNS를 통해 다른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보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따라서 우리는 타인에 대해 상당히 공감하는 능력이 높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어찌 단언할 수 있을까?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듯 SNS는 '프레임'이다. SNS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전부, 혹은 날 것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조각 내어 포스팅한다. SNS를 보며 타인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SNS로 타인이 보여주는 삶과 실제 그들의 삶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지도 모른다.




이 간극을 메워 줄 수 있는 것이 인문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예를 들어 보자. 추한 인간의 내면까지도 그대로 묘사된다. "아큐정전"의 아큐처럼 말이다. 아큐의 심리 묘사는 너무나도 내밀하다. 혹자는 아큐에게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관찰하고, '대리 수치'를 느끼기도 한다(참고로 내 얘기는 아니다ㅎㅎ)




아무튼 인문학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를 초월한 그 어느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 '협문'들은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말자. 우리가 창출하는 가치는 재무제표상의 숫자와 크게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총장님! 저희 '협문'들에게도 SK미래관 강의실을 許해 주십시요! '10년 전 라떼'는 말입니다, '애덜'이 그래도 고생을 좀 겪어봤습니다. 그래서 무거운 전공책을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등에 이고 문캠을 돌아다녀도 불평 하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새 애덜'은 다릅니다. 이들은 정말이지 '고생'을 모르고 자란 '디지털 네이티브'입니다. 옛날처럼 무겁디 무거운 전공책 이고 캠퍼스 각지를 돌아다니라고 강제할 수 없단 말입니다.




칼이 심장을 베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호소합니다.

존경하는 총장님, 교수님들, 그리고 교우 여러분!

저희 '협문'들에게도 부디 강의실을 許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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